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낙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채가>를 실었다. 각각 노년의 특수형태 노동자(약장수), 고학력 실업자, 1940년대판 하우스 푸어 이야기를 담았다.
일제강점기 경성 풍속도의 일면을 보여 주는 <낙조>(≪매일신보≫, 1933. 12. 8∼12. 29)는 박태원이 구인회에 가입하던 해의 작품이다. 1920년대의 문학은 단순한 정서적 표현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1930년대부터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여러 문예사조의 혼재나 구인회의 활동은 이러한 문학적 조류와 관련되어 있다. 카프가 보여 주던 문학의 목적주의가 퇴조하고 작품 그 자체에 중점을 두는, 도회적 감각이나 실험적 기교 등이 문학 양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낙조>는 이러한 태생적 환경을 갖고 있는 작품이며, 인생의 말년에 도달한 ‘최 주사’의 일상적 삶과 생각을 깊이 있게 천착했다. 이 무렵 박태원의 작품은 대체로 심리소설적 분위기를 띠고 있었고, 작가 자신도 그러한 형식과 경향에 대해 ‘심경소설’이라는 호명을 부여한 바 있다. 최 주사의 인생 역정은 주로 그가 접촉하는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데, 일본 유학으로부터 지금의 약장수에 이르기까지 이를테면 파란만장한 굴곡을 넘어온 터이다. 이 작품은 객관 세계의 묘사보다는 주관적 진실에 치중하며, 최 주사의 심경에 비친 당대 현실을 통해 삶의 총체성보다는 개별성의 구현에 주력한다.
박태원이 추구한 모더니즘 미학의 정점을 보여 주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조선중앙일보≫, 1934. 8. 1∼9. 1)은 무엇보다 새로운 문학적 기법의 도입으로 주목을 끈 작품이다. 현대의 경향·풍속 등을 탐구하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 자신의 분신에 해당하는 구보를 내세워 소설 창작 과정 자체를 소재로 삼은 미적 자기반영성, 현재와 과거의 교차에 의한 의식의 흐름, 영화의 이중노출(overlap) 수법 등 전통적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소설 기법이 시도되어 당대의 관습화된 소설 인식에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일정한 플롯이나 인물 중심의 외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주인공 구보의 심리를 통해 의식의 유동적인 추이만을 보여 주는 방식은 전통적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준 실험적인 시도였다. 특별한 목적 없이 거리를 배회하고 카페에서 문학을 하는 벗을 만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구보의 일상은 생활과 직업을 가지지 못한 채 방황하는 식민지 룸펜 지식인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채가>(≪문장≫, 3권 4호, 1941. 4)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가지고 있는, 세태풍속을 반사하는 거울이라는 기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앞선 두 작품으로부터 7∼8년의 시간적 상거를 두고 있는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기까지 박태원의 창작 성향은 이렇게 세태의 풍광을 뒤쫓는 형국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겠다.
특히 <채가>는 작가 자신이 ‘<자화상> 제3화’라고 명명하고 있어서, 당시 그의 일상생활이 어떤 외양을 갖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작품 가운데서 확인되는 바 ‘밤낮으로 붓을 달린’ 결과로 소설을 생산하는데,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집을 짓느라 무리하게 빌어다 쓴 돈의 이자를 갚기 위해서다. 이렇게 빚을 갚기 위해 씌어지는 소설은 통속성을 띨 수밖에 없으나, 기묘하게도 당대에서는 그 소설 유형이 일상적 삶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라는 새로운 양식에 도달하고 있다.
200자평
박태원의 중편소설 중에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물론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은 중편소설 <낙조(落照)>, <채가(債家)>를 실었다. 각각 1930년대 서울 서민층 노인의 생활 세태와 1940년대 하우스 푸어의 살림살이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지은이
박태원(朴泰遠)은 1910년 1월 17일(음력 1909년 12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보 재학 시절 ≪동명≫ 33호에 작문 <달맞이>를 싣게 된다. 1929년에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법정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한 뒤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다. 1933년에는 ‘구인회’에 가입해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4년 보통학교 교사인 김정애와 결혼하였다. 1938년에는 장편소설 ≪천변풍경≫ 및 단편소설집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출간했다. 해방정국 때 ‘조선문학가동맹’의 요직을 맡았으나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해 전향성명서에 서명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 오장환, 정인택, 이용악 등을 따라 가족을 남겨 두고 월북했다. 북한에선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 1, 2부를 썼다. 1986년 7월 10일 죽은 뒤에는 아내가 남은 자료를 정리, 집필하여 ≪갑오농민전쟁≫ 3부를 완성했다.
엮은이
김종회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나온 이래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해 왔으며, ≪문학사상≫, ≪문학수첩≫, ≪21세기 문학≫, ≪한국문학평론≫ 등 여러 문예지의 편집위원과 주간을 맡아 왔다. 현재 한국문학평론가협회와 국제한인문학회의 회장으로 있다.
차례
낙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채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당시에 나의 수중에 준비되어 있던 돈은, 全 工事費의 三分 一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므로, 우선, 청부업자는 두말하지 않고 일을 시작하여 주었다.
上樑 時에 건네어 주기로 한 다시 삼분 일의 공사비는 八方으로 주선한 끝에, 두 푼 오 리나 주기로 하고, 사사변을 얻어다 어김없이 갖다가 받혔다.
이제 남은 문제는 竣工과 동시에 그에게 내어 줄 마지막 삼분 일의 공사비인데, 그것은 나의 본래부터 예산이, 집이 거의 다 될 입시하여, 그 거의 다 된 집을 그대로 은행이나 조합에다가 집어넣고서, 더도 말고 전 공사비의 삼분 이 정도의 돈을 끌어내어, 절반은 이를 청부업자에게 주고, 다시 절반은 이를 먼저 얻어 쓴 사사변 淸算에 充當할 작정이었다.
공사는 별 지장 없이 순조로웁게 진행되었다. 나는 거의 매일같이 東小門 고개를 넘어 다니며, 처음에는 멀쑥하니 빈 기둥만 우뚝우뚝 서 있던 것이, 차차 기와를 잇고 벽을 치고 하자, 하루하루, 제법 집 모양을 갖후어 가는 꼴이, 보기에 하도 신통하고 또 재미스러워, 그만, 나의 觀相論 속에, 大事를 莫管하라 隨魔-不少니라 하는 글꾸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설혹 나의 本意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觀相쟁이를, 정녕, 靈하다고 할 밖에 없는 것이, 오죽하여야 죽을 數에다가 견주기까지 하는, 그러한 크나큰 일을 輕妄되이도 시작한 까닭으로 하여 나는 가진 곡경을 다 치르게 되고야 말았다.